덕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함덕리
함덕리(咸德里)는 “덕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1구~5구까지 5개의 구로 구분되어 있으며 각 구에서 선출된 개발위원, 대의원으로 회의 체계를 갖추고 노인회, 부녀회, 청년회로 조직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살게 된 원인은 해방 전후 제주 최초로 말구르마를 이용한 수박과 배추의 판매(제주시 공급 70%)로 부를 이루기 시작하여 현재는 마늘과 배추, 감귤, 백향과 등 다양한 지역특산물을 재배하고 있습니다.
매년 수십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함덕해수욕장의 백사장은 과거 8선진(멜떼를 에워싸는 8개의 선단) 땅이었으나, 현재 함덕리새마을회 소유로 기부되어 등기돼 있는 제주도 유일의 마을입니다. 기부의 뜻에 맞게 함덕리는 이를 마을 자산으로 활용하여 발생한 수익 중 누적 지원금 약 11억 원을 함덕 리민들을 위한 문화, 복지 및 교육사업에 환원하였습니다.
특히 함덕리는 매년 꾸준하게 인구증가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정착주민의 감소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마을로, 이주민들도 마을 조직에 다수 참여하여 이주민의 넓은 경험 및 새로운 시각과 선주민이 가진 지역문화를 가지고 마을을 좀 더 폭넓고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공존과 화합의 장이 마련되고 있습니다.
더불어 꾸준한 주민 역량 강화교육 및 문화 공동체 참여를 이끌며 주민 스스로의 힘으로 일정한 재정확보 후 마을에 재투자하는 문화‧복지가 풍부한 선순환 체계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함덕리입니다.
설촌유래
마을의 형성과 변천
함덕리의 지명을 고찰해보면 함덕 정보산업고등학교가 서있는 신흥리 입구 부근을 금성문(錦城門)이라 하며 마을 서쪽 입구의 남쪽을 병문이라 호칭합니다. 병문에서 수남끝 길을 따라 남쪽에 남문기가 있는데 이 세 개의 점을 잇는 삼각(三角)에서 바다쪽으로 드문드문 밭담가에 대(竹)왓과 옛 집터의 흔적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또 병문 남문기까지 길을 건너 바닷가의 도릿개까지 당동산 장구왓 걸매못 지새왓등의 터전들이 흩어져 있는데 여기서는 현재도 도자기의 파편과 흙으로 구워 만든 기왓장 흔적이 나온다. 이것들이 해녀탈의장 바로 남쪽부터 병문들까지 쭉 연결되는 것으로 보아 함덕리 마을의 시초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함덕(咸德)이라는 현촌 이름이 기재된 것은 1,27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함덕리는 고려 원종 14년(1273년) 삼별초 군이 여몽연합군과의 전투에서 참패하여 피가 흘러 내를 이루었다는 민족항쟁의 처절한 격전장이었고 고려 충렬왕 26년(1300년)에 고려의 현촌 도내(14촌)중 하나의 마을이었습니다. 삼별초의 방어진지가 되면서 군사 진지 해상교통의 요지로서 농업노동인구 공마진상의 부역 해상활동을 위한 상업인구의 집결로 대촌마을이 되어 농경정착생활의 기반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1702년(숙종28년)에 이형상 목사 등에 의해 그려진 탐라순력도에서 함덕포가 있고, 1800년대의 지도에는 함덕포의 이름이 ‘강영개‘로 표시되어 있다. 강임포는 강영의 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탐라지등의 기록에는 함덕에 강림사가 있었다고 전합니다. 현의 시절에서 1910년대까지 행정구역상 함덕은 바로 조천,김녕과 경계하고 있었으며 신흥리와 분동된 것은 1924년 일제하의일이었다. 제주군 신좌면이었던 것이 1935년 면의 명칭을 소재지로 바꿀 때 조천면으로 개칭되어 여기에 소속되었습니다. 함덕리는 서쪽에서부터 1구, 2구, 3구, 4구인 평사동.신사동으로 나뉘어 있고 마을이 큰 만큼 구끼리의 구분은 분명하게 되어 있습니다.
구전되는 리명(里名)의 내력
어느 해에 흉년이 들어 마을 사람들이 온통 굶주림에 시달렸습니다. 근검절약으로 부를 이룩한 함씨 할머니가 죽을 만들어 지나가는 사람에게 돌 한덩어리씩 옮기게 하고 한 그릇을 대접하였습니다. 그래서
함씨 할머니는 흉년에 마을 사람들에게 큰 자선을 베풀었고 동시에 마을에는 오랜 숙원이던 다리가 만들어 졌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에 근거하여 함씨 할머니의 덕으로 설촌이 완성되었다는 의미에서 리명이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함씨가 제주에 입도한 것은 400년 미만이라는 통설로 보아 신빙성 있는 자료로는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풍수지리학적인 의미
풍수지리에 권위있는 학자의 자문 결과에 의하면 , 서우봉은 마치 마을에 병풍을 두른 것 같으면서 살찐 물소가 뭍으로 기어 올라오는 듯한 형상을 지니니 가히 덕산으로 일컫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러한 명당의 지형적 조건이 함덕의 취락형성의 기초가 되었으며, 지리학적 의미로 한자를 해석하여 "덕 있는 사람들만이 모여 사는 마을" 이라는 뜻에서 함덕이란 리명이 작명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한자 풀이로 본 견해
함(咸)자의 풀이는 " 다할 함, 골고루 함, 같을 함'" 등이며, 덕(德)자는 " 덕 있는사람 덕, 품행 덕, 군자 덕" 등이다. 이 두자의 뜻을 조합하면 "모든 사람들이 덕을 지닌 품행을 한다"라고 풀이 할 수 있습니다. 또 서경에는 위사람과 아랫사람 모두가 거짓과 꾸밈이 없이 덕을 지녔다는 뜻의 "함유일덕(咸有一德)" 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도 위의 한자 풀이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함덕이라는 말은 "평등, 평화, 박애, 번영" 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이 살펴볼 때, 본리를 설촌한 조상들이 후손들에게 천추 만대에 길이 전하고자 하는 유언을 리명으로 상징화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